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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회문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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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치 덕치면 회문리 100-1, 101-7
· 문의 및 안내
· 전화번호
· 홈페이지 없음
· 지정 현황 등록문화재 595호

운암망루와 회문망루는 6ㆍ25전쟁 당시 회문산 및 지리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비들로부터 주민들과 시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한 진지이다. 운암망루는 나래산(544) 일대의 공비 침입을 조기 발견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당시 군․경찰과 지역의경들의 합동 근무장소로 사용하다가 군 철수후 회문산 빨치산 토벌시 방어진지로서 당시 관내 치안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근동에 있는 오수역과 칠보발전소는 당시 남한일대의 주요 전력공급처였고, 오수역을 통해 오가는 물류, 특히 무기 및 실탄은 공비들의 무장을 보완하는 주요 방책이었다.[6ㆍ25 전쟁과 임실]

[6ㆍ25 발발, 위키피아] 1950년 6월 25일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38선 이남으로 진격하였다. 이는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바, 파문은 참으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은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남로당의 남한 내부 전복을 위한 활동과 이를 제압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충돌로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간 지속된 교전으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지주들의 처벌과 그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전라북도 호국경찰사]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한 인민군은 7월 22일 전주형무소를 완전히 장악한 후 주요인사들을 체포했다가 9월 15일을 기해 철수를 시작하였고, 9월 18일 방호산 소장의 제6사단 2,000여명이 지리산에 잠복 입산하였다. 이 즈음 9월 24일에서 26일까지 3일 동안 300여 명이나 무참히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9월 20일경 인공치하 전주형무소 수감자들은 형무소 뒤뜰에 폭3m, 길이 5m가량의 구덩이 수십개를 팠다. 당시 형무소에는 미결수 감방 34개, 기결수 감방 60여개가 있었고, 공무원, 경찰관, 형무관과 가족 등 우익인사 1,500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북한군은 24일부터 26일까지 수감자들을 한명씩 불러서 구덩이 앞에 세워놓고 괭이와 삽 등의 농기구와 몽둥이, 망치 등을 이용하여 살해하였다. 당시 피해자중 유가족이 없는 희생자 175명은 주변 야산에 매장되었다가 전주형무소가 노송동에서 평화동으로 이전되고 야산이 주택지로 개발되면서 전주시 외곽 효자동 공동묘지에 이장되어 관리되고 있다. 한편, 9월 3일부터 12월 31일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중 전국 각기제 산재된 공비는 약 5만 6,432명, 비무장병력이 약 4,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북한국 제6사단, 제7사단, 제9사단의 패잔병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투철하였고, 지리산, 덕유산, 회문산 일대에 숨어 험준한 산세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유격전으로 대응하였다. 1950년 10월 10일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에 거점을 둔 임실군당공비 150명이 경찰서를 기습했으나, 임실경찰서장 기종대 경감의 지휘하에 공비들을 격퇴하였다. 또한 10월 15일 다시 170명의 공비가 재차 습격해오자 역시 3시간의 교전 끝에 물리쳤다. 10월 25일에는 10여 정의 중화기로 무장한 공비 700명이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를 습격하자 임실서원 60명이 나아가 11시간의 치열한 싸움 끝에 공비 16명을 사살하였다. 10월 16일 12시경 여수발 서울행 임시군용열차가 남원 북쪽 서도역으로 향하던 중 서도 남쪽 4km 지점에서 공비들이 철로에 설치한 TNT 폭발로 인해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철도 양측에 매복한 공비들이 열차를 호송중이던 경찰을 공격하는 한편 승객을 위협하여 청장년 207명을 납치히고, 동 열차에 적재된 소총실탄 2만여 발과 박격포찬 및 로캣탄을 약탚하여 서도역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11월 1일에도 중화기와 소총으로 무장한 공비 550명이 칠보발전소를 위협하였다. 이에 군경 200명이 출동하여 공비 30명을 사살하고 격퇴시켰다.

 

[황송문 시인제공, 인터넷자료] 오수에는 경찰도 군인도 없고 소위 빨치산이라는 공비들이 살인ㆍ방화ㆍ약탈 등을 일삼으며 준동하고 있을 때, 지방 청년들이 소위 자경대를 조직하여 무장을 갖추고 마을을 지켰다. 당시 자경대 대장은 박종수였다. 박종수 특공대장이 박세경 추진위원(국회의원이 됨)과 함께 대구에 가서 1700정의 무기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공비들의 기습을 받았다. 엠원 소총 한 정에 1만2000원, 카빈 소총이 한 정에 7000원, 권총이 3만5000원, 아세보총이 3000원씩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임실군 각 면의 대원들을 완전무장 시킬 수 있는 양이었다. 마치재 고개를 넘어오던 트럭이 공비들의 기습을 받아 불타고 총격전 끝에 오수역장과 지사면 대원이 희생되었다. 두 구의 싸늘한 피투성이 시체는 군용 트럭에 실려 오수로 왔다. 6ㆍ25전쟁 당시 공비들의 준동이 가장 극심한 곳은 지리산 일대와 회문산 주변지역이었다. 이현상 게릴라부대의 훈련장이기도 한 지리산은 북한 인민군 4개 사단 2만 명이나 되는 빨치산의 소굴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30개 부락을 습격하여 무려 2,000여 명이나 되는 양민들을 납치해 가기도 했다. 1951년 가을 어느 날, 나는 불이 붙은 채 달려오는 기차를 보았다. 남원에서 부상병을 싣고 전주로 향하던 열차가 오류역 부근에서 공비들로부터 기습을 당했다고 한다. 공비들은 세 개의 화차에 부상병을 싣고 올라가는 열차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고 불을 질렀다. 열차는 순식간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열차에 붙은 불길이 더욱 거세질수록 목숨이 붙어있던 부상병들의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터져 나왔다. 오수면 특공대는 임실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긴급히 출동했다. 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부상병들은 이미 불에 탄 채 싸늘한 시체로 굳어 있었다. 일부 대원들은 공비의 습격 가능성을 예상한 나머지 종동과 평당으로 길을 잡고 나아갔다. 이날 공비들의 기습을 받고 김용호 대원이 쓰러졌다. 그의 귀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종동과 평당을 지나온 특공대원들이 지원사격을 했다. 화차가 움직이는 곳으로 접근하면서 기습공격을 가해오던 공비들이 대원들로부터 사격을 받고 주춤거리다 마침내 도주하기 시작했다. 공비들은 사살된 자기 동료의 시체를 질질 끌면서 도주하다 대원들의 공격을 받고 또 한 명의 공비가 총상을 당하게 되자 시체를 버린 채 도주했다. 대원들은 높은 지대에 머물러있는 나머지의 화차도 밀어 내렸다. 기차 화통간은 화통간대로, 화차는 화차대로 저절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불길이 타는 상태에서 내려가는 화통간을 바라보던 주민들은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했다. 오수역을 지나친 기관차는 앙골마을 앞에서 멈춰 섰다. 대원들은 기관차를 다시 오수역으로 밀고 와야 했다. 이튿날 불타죽은 부상병들의 시체는 북부산 공동묘지로 옮겨지게 됐다. 불길에 타고 그을린 열여덟 구의 시체는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화차에 누워있던 18명 부상병 전원이 죽었는데 이들은 주로 미군과 전투경찰대원들이었다. 회문산(回文山)일대에 거점을 둔 공비는 소위 전북도당의 항미부대와 외팔이부대였다. 이들은 주로 쌍치, 복흥, 구림 등 순창군내의 미수복 지구를 장악하고는 공공건물이나 사찰을 점령하여 인민학교와 군사훈련소까지 설치해 놓고 농사까지 짓고 있었다.

[6ㆍ25와 열차 습격사건]('성수의 역사와 문화', 임실문화원, 2011, 242~243쪽 참조)

오류역은 임실역과 5km구간으로 오류역에서부터 임실역까지 올라가는 경사지가 운행을 어렵게 했다. 당시의 기차는 석탄을 이용한 증기기관차로 오류역에서 한참을 기다리며 증기를 보충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역이었다. 6ㆍ25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50년 6ㆍ25가 발발되고 전쟁중에 아군과 적군이 밀고 밀리고 하는 과정에 1951년 10월경 순천에서 출발하여 전주방향으로 올라가는 기관차가 있었다. 당시의 기관차는 앞에 화물칸 1량을 달고 그 화물칸에는 일반인들과 일부 군인들이 섞여 타고 있었고, 여수에서 올라오는 생선장수들이 많은 생선을 가지고 함께 타고 있었다. 그리고 뒤의 2칸은 군인들의 식당과 당시 위문단들의 침대 칸으로 미군들 일부와 위문단원들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사고 지점인 임실군 성수면 월평리 신촌마을 뒤에서 임실 쪽으로 500m지점에 느리게 올라가는 기관차에 갑자기 빨치산들로 하여금 폭발물에 의한 습격을 받았다. 현장에서 앞의 2량은 전복되어 일부 사상자가 나왔고 뒷부분 식당과 침대차량 2량은 분리되어 오류역 쪽으로 경사를 타고 떨어져 나갔는데, 이 2칸은 오수역까지도 통과되었다. 오수역을 지나 용정리 부근의 약간 높은 철길을 넘지 못하고 다시 오수역으로 탄력을 받아 굴러오기를 몇차례 번복하였다고 한다. 그 때 오수역원들은 이 2량을 세우기 위하여 인근 농가에서 짚으로 만든 덕석을 철길 위에 겹겹이 쌓아 차량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 타고 있던 승객들 중에는 미군들을 비롯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으며 내국인들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하여 찾아가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미군들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증언을 못하지만 이때 증언자의 기억으로는 미군 부상자 한 명에 대하여 헬리콥터를 이용, 광주육군병원으로 수송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많은 희생자들은 당분간 역주변에 있었는데 피비린내가 말도 못할 정도였으며 장기간 이었던 시신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은 그 시대를 겪었던 분들의 증언을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최근에는 6ㆍ25전사를 연구하는 분들에 의하여 당시 임실에서 열차습격사건으로 미군 8명이 전사하였는데 북부산 공동묘지에 묻혀있다는 기록을 찾아 이를 근거로 미국 태평양 사령부까지 연결하여 유해발굴을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북경찰60년사] 이러한 상황은 이 지역에 공비의 출현이 예상되는 시점이었고, 이 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암망루, 회문망루의 건립이 왜 현재의 자리에 있을까? 이와 같은 의문에 답은 '전북경찰 60년사'를 통해 정황을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1951년 1월 14일 새벽 5시를 기하여 순창 회문산 지구에 근거를 둔 공비 약 1,900명이 칠보발전소를 파괴할 목적으로 발전소 및 지서를 완전히 포위하였다. 중화기를 앞세운 공비의 대거 내습을 받은 칠보발전소는 제18전투경찰대대 제2중대원 95명과 칠보지서원 45명 등 140여 명만이 대치하고 있었고, 급보를 받은 제18대대장 차일혁 경감은 대원 104명을 지휘하여 응원출격한다. 당시 칠보발전소는 강원도 영월발전소가 적에게 재점거된 직후라 남한 일대의 송전을 도맡아하는 곳인데, 오랫동안 적의 포위로 인하여 송전이 불안할뿐더러 호남 일대의 평야 관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동진수리조합의 저수지조차 적의 수중에 들어있기 때문에 중앙에서도 이를 상당히 중요시하고 치안책임자에게 문책까지 있었기 때문에 칠보발전소를 탈환회복하라는 특병이 있을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발전소를 탈환후 공비들의 송전방해를 목적으로 취수로를 장애물로 차단하고 모터와 기계 등을 파괴하여 놓았으므로 복구하지 않으면 송전할 수 없었다. 이를 복구하려면 취수구가 있는 회문산 전방에 접근해야 했고, 이곳은 공비 사령관 방준표가 웅거하고 있는 곳이었다. 11사단 13연대 제1대대와 호응하여 지원을 받아서 회문산 전방 취수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결사적인 병력을 동원하였다. 결국 2월 12일 송전공사가 완성될 수 있었다.

 

[이인철 전북체육발전연구원 원장 증언] 이인철 원장의 증언에 따르면, 임실운암망루 및 회문망루의 설치는 칠보발전소를 지키기 위해 공비의 접근을 막기위한 보루이다.

 

 

이용 안내

· 지 정 :등록문화재 - 근대문화유산

· 종 목 :등록문화재 제595호

· 지정일 :2014.09.01

 

위치 정보

  • 강산에가든

    전북 임실군 덕치면 회문3길 2

    063-643-5786

  • 길손식당

    전북 임실군 강진면 호국로 32-7

    063-642-5007

  • 길손집

    전북 임실군 강진면 호국로 32-5

    063-643-1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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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임실군 강진면 호국로 10 강진 공용버스터미널

    061-644-5505

  • 섬진강 다슬기마을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강운로 강운로 122-12

    063-642-8558

  • 성심회관

    전북 임실군 강진면 호국로 11

    063-643-1328

  • 성원회관

    전북 임실군 강진면 호국로 44-1

    063-643-1063

  • 천담집

    전북 임실군 강진면 갈담1길 10-1

    063-643-1068

  • 행운집

    전북 임실군 강진면 호국로 14-12

    010-4364-1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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